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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 - 신념이 붕괴할 때 인간은 어디에 기대는가

by rips0409 2025. 11. 17.

퍼스트 리폼드 영화 포스터 이미지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 2017)》는 단순한 종교 영화의 범주를 벗어난, 철저히 실존적이며 철학적인 작품입니다. 폴 슈레이더 감독은 ‘죄와 회개’라는 전통 신학의 언어를 통해 현대 사회의 위기—환경 파괴, 자본 권력, 종교의 무력함—를 해부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신념의 붕괴’를 경험하고, 결국 파멸 혹은 구원이라는 양극단의 문지방까지 걸어가는지를 치밀하게 묘사합니다. 《퍼스트 리폼드》는 묻습니다. “신념이 무너지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가?”


1. 신념의 침몰 — 종교는 더 이상 해답이 되지 못하는가

주인공 에르스트 토럴(이선 호크) 신부는 작은 교회를 홀로 맡아 조용히 살아가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붕괴 직전입니다. 그가 맡은 《퍼스트 리폼드》 교회는 관광지에 불과하고, 사역은 형식적으로만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부로서의 역할은 남아 있지만, 믿음의 실체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환경운동가였던 마이클과의 상담은 그의 신념을 무너뜨리는 촉매가 됩니다. 마이클은 지구가 회복 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과학적 보고서를 제시하며, 인간의 미래는 이미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절망은 단순한 개인의 우울이 아니라, 시대 전체가 겪는 윤리적 무기력의 상징입니다.

토럴은 처음에는 종교적 언어로 그를 위로하지만, 이내 스스로도 “종교가 현대의 위기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교회는 자본과 결탁하고, 환경 파괴 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종교적 윤리는 자본 논리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신의 침묵 — 극단으로 향하는 정신의 균열

토럴은 마이클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합니다. “이 절망의 시대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신은 존재하는가?” 그 질문은 신부 자신을 향하는 화살이 되고, 그의 신념은 서서히 깨지기 시작합니다. 신의 침묵은 그의 심리적 균열을 폭발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 됩니다. 종교적 해답을 잃어버린 그는 점점 마이클의 절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2. 회개의 역설 — 신은 용서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회개는 종교에서 용서로 가는 첫 단계이지만, 토럴에게 회개는 죄를 씻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파괴를 향한 길목이 되어 갑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아들을 전쟁에 보내도록 독려했던 과거의 자신을 단죄하며,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하나의 ‘죄’로 규정합니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지만, 그의 일기에는 점점 폭력적이고 암울한 단어들이 늘어갑니다.

마이클이 극단적 선택을 한 뒤, 토럴은 그의 죽음이 “세계의 죄가 인간 한 명을 파괴한 사례”라고 믿게 됩니다. 그는 마이클이 남긴 환경 파괴 기업의 자료, 폭력적 선동 메시지, 심지어 자살 폭발 조끼까지 접하며, 스스로도 그 길로 빨려들어갑니다.

회개는 왜 구원이 아닌 파멸이 되는가

토럴은 회개해야 한다고 믿지만, 두 가지 이유로 그것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1)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는다.
그에게 신은 존재하지만, 신의 은총은 자신에게 닿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그의 신은 인간의 절망에 침묵하는 “부재의 신”입니다.

2) 그는 세계의 죄를 자신이 떠안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개인적 회개를 넘어, “환경 파괴를 방치한 세계 전체의 죄”를 자신의 몸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믿음은 구원이 아닌 파멸을 향해 극단적으로 변질됩니다.


3. 현대 신학의 붕괴 — 신념은 왜 자본에 무너지는가

이 영화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지점은 현대 종교의 구조적 타락입니다. 토럴이 섬기는 작은 교회는 큰 교회 ‘아바운드 라이프’의 후원 없이 유지될 수 없으며, 그 아바운드 라이프는 환경 파괴를 일으키는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습니다.

즉, 종교는 이미 자본의 보호막 아래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사랑과 희망, 돌봄의 메시지는 기업의 이미지 세탁을 위해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 구조를 깨닫는 순간, 토럴의 신념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종교는 더 이상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장소이며, 정의롭지 않은 자본과의 결탁 속에서 ‘윤리적 목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은 역사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 기능을 잃는가

《퍼스트 리폼드》는 종교가 구조적 세계의 위기를 설명하는 데 실패할 때, 개인의 신념은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철저히 보여줍니다.

토럴은 묻습니다.
“신은 이 세상을 정말 돌보고 있는가?”

하지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그것이 현대 신학의 공백이며, 그 공백이 바로 토럴이 파멸로 향하는 이유가 됩니다.


4. 구원은 존재하는가 — 인간의 절규가 닿는 마지막 지점

영화의 후반부, 토럴은 환경 파괴 기업 대표가 참여하는 기념식에서 자폭을 계획합니다. 그의 선택은 ‘순교’가 아니라, 절망의 시대에 신앙이 무너졌을 때 남는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자폭 직전, 그는 메리를 떠올립니다. 마이클의 아내이자, 유일하게 그에게 따뜻하게 다가온 존재. 그녀는 토럴에게 신이 주지 않은 ‘연결의 감정’을 제공합니다.

결국 그는 폭발 조끼를 벗어 던지고, 메리와 마주 서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 두 사람의 포옹은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호하게 그려지지만, 그 모호함 자체가 의미가 됩니다.

관계에서 피어나는 작은 구원의 가능성

토럴이 발견한 마지막 가능성은 신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적 연대입니다. 그가 살고자 하는 마음을 되찾는 순간은, 종교적 신념이 회복될 때가 아니라, 타인의 온기가 닿을 때입니다.

즉, 이 영화는 신의 구원 대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현실적 구원의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5. 결론 — 신념이 무너진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퍼스트 리폼드》는 죄, 회개, 신념의 붕괴, 구조적 절망을 정면으로 다루지만, 동시에 매우 조용한 방식으로 희망의 가능성을 건네는 영화입니다.

토럴이 걸어가는 길은 파멸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는 인간적 관계라는 작은 빛을 붙잡습니다. 그것은 신학적 구원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구원입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단순합니다.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구원할 것인가?”

《퍼스트 리폼드》는 신념의 부재와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조용하지만 뼈아픈 통찰을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