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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Black Mirror: Bandersnatch)》 — 선택의 얼굴을 한 통제의 미로

by rips0409 2025. 11. 28.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영화 포스터 이미지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2018)》는 넷플릭스가 선보인 인터랙티브 영화라는 형식 자체로 이미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관객이 버튼을 눌러 주인공의 행동을 결정하는 구조는 “내가 이야기를 움직인다”는 권능을 부여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가 끝날수록 그 감각은 불편한 질문으로 전환됩니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선택의 범위는 이미 설계되어 있지 않은가라는 의심이죠. 밴더스내치는 기술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자유의지, 통제, 자아 인식을 영화의 구조 자체로 체험시키는 드문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무대는 1984년 영국. 게임 개발자 스테판 버틀러는 인터랙티브 소설 ‘밴더스내치’를 원작으로 한 게임을 만들려 하지만, 개발 과정은 곧 그의 현실을 잠식합니다. 시청자는 스테판의 선택을 돕는 존재처럼 개입하지만, 그 개입이 깊어질수록 스테판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붕괴해갑니다. 결국 밴더스내치는 “선택 가능한 이야기”라는 형식을 통해, 선택 불가능한 세계의 구조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역설의 작품으로 완성됩니다.


1. 줄거리 요약 — 선택하는 자와 선택당하는 자의 경계

● 게임을 만드는 남자, 게임이 되어가는 삶

스테판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는 그 상처를 애써 덮은 채, 신생 게임 회사 ‘터커소프트’의 제안을 받아 소설 ‘밴더스내치’를 게임으로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원작 소설이 “독자가 결말을 선택하는 이야기”라는 점은 스테판의 프로젝트를 더 매혹적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그를 서서히 압박하는 구조로 돌아옵니다. 개발이 진행될수록 스테판의 일상은 선택과 결과, 후회와 강박으로 점점 조여 오고, 관객은 그 순간마다 버튼을 눌러 그의 삶을 결정하게 됩니다.

● 선택의 분기점에서 드러나는 균열

관객의 선택에 따라 스테판은 회사와 협업하기도 하고, 집에서 혼자 개발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로를 밟더라도 스테판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현실을 통제하려는 강박에 빠져듭니다. 그는 동일한 하루를 반복하며 작은 선택을 되돌리고, 자신이 만든 세계가 완벽하게 작동하길 원하지만, 그 욕망은 뻗어나갈수록 그를 더 깊은 혼란으로 끌고 갑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한 가지 사실을 교묘하게 드러냅니다. 우리가 고르는 선택이 스테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더 깊은 구조 속으로 밀어넣는 힘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선택의 자유가 확대되는 듯 보일수록, 실제로는 더 정교한 통제의 그물망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 줄거리의 핵심은 바로 이 감각적 역전에서 발생합니다.


2. “내가 선택했다”는 착각 — 시스템이 설계한 자유의 범위

● 선택의 주체는 누구인가

스테판이 겪는 공포는 단지 개발 스트레스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반복되는 선택의 분기점에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고 믿었던 삶이 사실은 외부의 지휘를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에 도달합니다. 관객은 그 감각을 스테판과 동시에 체험합니다. ‘선택지’는 분명 내 앞에 등장하고, 나는 그것을 눌러 결과를 본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깨닫게 되는 건, 그 선택지가 내 자유의 증거가 아니라, 자유를 연출하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알고리즘적 삶과 밴더스내치의 구조

영화가 은근히 겨누는 대상은 1984년의 게임 산업이 아니라, 선택을 개인의 의지로 포장하는 현대 시스템입니다. 광고 노출이 취향을 만들고, 추천 알고리즘이 관심사를 좁히며, UX 설계가 행동의 방향을 유도합니다. 우리는 “내가 고른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고르게 설계된 것”을 선택합니다. 밴더스내치의 인터랙티브 구조는 그 현실을 가장 물리적인 방식으로 재현합니다. 결국 관객은 버튼을 누르며 깨닫습니다. 선택의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 아니라 ‘허용된 범위’일 뿐이라는 점을요.


3. 자유의지와 통제 — 메타 내러티브가 만드는 심리 실험

● 관객이 곧 ‘신’이 되는 구조

밴더스내치가 특별한 이유는, 주인공이 통제당한다는 사실을 영화 속 인물도, 영화를 보는 관객도 함께 인식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습니다. 스테판은 어느 순간 “누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확신에 도달하고, 그 대상이 ‘미래의 넷플릭스 시청자’라는 메타 설정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때 관객은 자신이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존재였음을 갑작스럽게 자각합니다. 영화는 그 불편함을 해소하는 대신 더 밀어붙여, 관객을 이야기의 공범으로 끌어들입니다.

● 통제를 자각하는 순간 붕괴가 시작된다

스테판의 정신이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는 ‘선택이 통제받고 있음을 눈치채는 순간’입니다. 인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단순한 실패나 불행이 아니라, 내 삶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입니다. 스테판은 그 의심을 견디지 못하고 폭력, 공포, 망상으로 치닫습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자유의지의 허상을 드러냅니다. 자유는 믿음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의 정신도 함께 붕괴한다는 냉혹한 진실이죠.


4. 다중 결말의 의미 — 선택을 반복해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구조

● 수십 개의 결말, 하나의 정서

밴더스내치는 여러 결말을 제공합니다. 어떤 결말에서는 스테판이 살인을 저지르고, 어떤 결말에서는 정신병원에 갇히며, 또 어떤 결말에서는 현실과 허구를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선택이 달라질수록 결과는 확연히 바뀌는 듯 보이지만, 정서적 방향은 놀라울 만큼 비슷합니다. 대부분의 결말이 자아 붕괴, 죄책감의 반복, 통제의 강화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 결말이 많을수록 자유는 더 좁아진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잔인한 농담을 던집니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갈림길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리고 어떤 결말을 보더라도 결국 “이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결말”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밴더스내치의 다중 결말은 자유의 확장이 아니라 통제 구조의 반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관객은 여러 번 다시 선택해보지만, 어느 지점에선 깨닫게 됩니다. 이 미로의 밖은 ‘선택’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결론 — 밴더스내치는 “자유의지 체험관”이 아니라 “자유의지 해체기”다

《밴더스내치》는 인터랙티브 영화라는 새로움 덕분에 주목받았지만, 그 형식이 진짜로 노리는 것은 ‘재미있는 선택’이 아니라 ‘선택의 불편한 본질’입니다. 관객은 스테판의 삶을 조종한다고 생각하며 이야기에 참여하지만, 결국 그 참여 자체가 통제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증명하려 하지만, 그 선택이 허용된 틀 안에 존재하는 이상 자유는 언제나 ‘연출된 감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그리고 더 깊게는, 자유롭다고 믿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인간 아닌가? 밴더스내치는 그 질문을 관객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해, 결국 우리가 사는 현실의 구조까지 되묻게 만드는 차가운 거울 같은 작품입니다.

마무리 한 줄

《밴더스내치》 — 내가 선택했다고 믿는 순간, 선택은 이미 누군가의 설계 안에 있다.